“제자도 – 삶으로 이어지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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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에게 이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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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0:25–37 NKRV
25 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26 예수께서 이르시되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27 대답하여 이르되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자신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하시니 29 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3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31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 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35 그 이튿날 그가 주막 주인에게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며 이르되 이 사람을 돌보아 주라 비용이 더 들면 내가 돌아올 때에 갚으리라 하였으니 36 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 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몇 해 전에 한 택시기사가 운전을 하던 중에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집니다. 마침 뒷좌석에는 승객 2명이 탑승을 하고 있었죠. 그렇다면 당연히 119에 신고를 해야 할 텐데 이 승객들은 운전기사를 버려둔 채 사라집니다. 이 운전기사는 결국 심정지로 사망하고 마는데요.
이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블랙박스가 공개됐습니다. 영상을 확인해 보니까 이 승객들은 운전기사가 의식을 잃고 쓰러지자 일단 앞좌석으로 갑니다. 그런데 앞좌석에서 운전사를 구조한 게 아니라 차 열쇠를 뽑아가지고는 트렁크를 연 뒤에 자신들의 골프백을 꺼냅니다. 그리고는 황급히 다른 택시를 갈아타고 떠나는 겁니다. 참 어처구니없는 행동이죠. 경찰이 수소문 끝에 이 승객들을 찾아냈는데요. '일본으로 골프여행을 가는 길이었는데 비행기 시간이 촉박해서 그랬다' 이렇게 해명을 했습니다. 아니 어떻게 사람목숨보다 골프가 중요하냐? 이 사건으로 이들이 법의 처벌은 받지 않았지만 많은 이들에게 공분을 샀습니다.
이 사건이 2016년이 있었던 일인데, 이를 계기로 ‘선한 사마리아인 법’을 제정해야 한다는 의견이 높았습니다. 선한 사마리아인 법은, 자신에게 특별한 위험을 발생시키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곤경에 처한 사람을 구해주지 않는 행위를 처벌하는 법을 말합니다.
이 법은 사회의 구성원으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도덕적고 윤리적인 문제를 법적인 영역으로 가져오겠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사마리아인’이라는 말은 어디서 오게 된 걸까? 대부분 아시겠지만,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 누가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하신 비유 이야기에서 유래가 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선한 사마리아인 법이 어떤 도덕적 책임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오늘날 개인주의가 팽배한 시대에 사회적 구성원으로서 책임을 다하라는 이야기로 들립니다.
그러나 정확히 원래 예수님의 비유의 의도는 그렇지 않습니다. 영생을 얻은 길은 무엇인지 묻는 한 율법교사에게, 종교적 위선을 버리고, 삶으로 사랑을 베풀라는 제자도의 관한 말씀입니다.
따라서 오늘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잘 이해하기 위해서는 말씀의 배경과 문맥을 먼저 파악해야 합니다. 이 비유를 온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만 따로 볼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어떤 상황에서 이 말씀을 하게 되셨는지 살펴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먼저, 이 이야기는 예수님이 다른 누구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그 상대는 ‘한 율법학자’이고 그 율법학자가 예수님께 질문하고 답하는 대화 속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어느 날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25절입니다.
25.어떤 율법교사가 일어나 예수를 시험하여 이르되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율법교사는 어떤 사람일까요? 율법교사는 성경에서 서기관이라고도 불리 우는 법률전문가입니다.
레위 지파 출신으로 율법연구와 필사가 주된 임무였습니다. 유대교 경전에 대한 권위를 가진 전문가입니다. 그런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질문을 겉으로 보면 굉장히 공손하고, 예수님께 배우고자 하는 자세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예수를 시험하여’라는 의도가 숨어있습니다. 질문의 의도와 동기가 선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질문을 한 것이 아니라 시험한 것입니다.
예수님께 질문하고 예수님의 답변에서 실수가 발견되면 그것을 꼬투리 잡으려는 속셈으로 질문했던 것입니다.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율법교사의 원래 질문은 ‘영생’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에 관한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으십니다. 다만 율법사의 질문을 바꾸어서 어려움에 처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야 함을 강조하십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긍휼의 마음으로 다가가고 그의 좋은 이웃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 말 뜻을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이웃사랑의 실천으로 구원을 얻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이웃을 도와주어서 구원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구원은 오직 예수님이 전하시는 복음을 받아들임으로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이미 영생을 얻은 제자들로서 마땅히 이웃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구원받습니다. 그렇다면 믿음은 무엇일까요? 믿음은 기독교가 말하는 교리에 지적으로 동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입술로 믿고 고백한다는 것으로 끝나서도 안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란, 지정의를 포함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구원사건을 지적으로 동의하고, 입술로 고백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진정 제자의 삶입니다.
오늘 예수님과 율법교사의 대화를 통해 ‘제자도-삶으로 이어지는 믿음’에 대해 나누고자 합니다.
오늘 두 가지를 나누기 원하는데요. 첫째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이웃에 대한 성경적 정의이고, 두 번째는 ‘나는 누구에게 이웃인가?’라는 것입니다.

1.누가 나의 이웃인가?

율법교사는 예수님께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29절입니다.
29.그 사람이 자기를 옳게 보이려고 예수께 여짜오되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이니이까
이 질문의 의도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를 드러내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은 자신의 이웃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은 것입니다.
‘내 이웃은 누구입니까?’ 라는 질문에 예수님은 한 이야기를 꺼내십니다. 30절입니다.
30.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여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북동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도시입니다. 예루살렘은 해발 762미터, 여리고는 해저 258미터였기 때문에 보통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갈 때 내려간다는 표현을 씁니다. 이 길은 오래 전부터 위험하기로 악명 높았습니다. 길이 고불고불하고 돌들이 많아서 주변에 강도들이 숨어 있다가 지나가는 여행객들을 습격했습니다.
오늘 이 이야기를 듣는 유대인들은 이러한 지리적 특성과 배경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 ‘어떤 사람’은 당연히 유대인입니다. 그가 강도를 만났고 강도들은 그의 옷을 벗기고 구타하고 반주검 상태로 버려두고 떠났습니다. 그리고 세 사람이 등장합니다. 31-34절입니다.
31.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32.또 이와 같이 한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되
33.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여행하는 중 거기 이르러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34.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매고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니라
때마침, 제사장이 지나갑니다. 아마 제사장은 예루살렘에서 성전의 임무를 마치고 여리고의 있는 집으로 가는 중에 강도만난 사람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를 피해 지나갑니다.
다음으로 한 레위인도 그 현장을 보았지만 피해서 지나가 버렸습니다.
세 번째로,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현장을 지나던 중 강도 만난 사람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가까이 갔고,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붕대로 상처를 싸맸습니다. 뿐만 아니라 짐승에 태워 여관에 데리고 가서 돌봐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다음 날에는 여관 주인에게 돈을 주며 보호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들려주신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이 듭니다.
유대인 중의 참 유대인으로 여겨지며 자부하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입니다. 율법을 연구하고 지키는 사람들입니다. 매일 예배를 드리고 집례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사랑하고 백성들을 사랑하는 임무를 맡은 두 사람은 그 자리를 피하고 지나갑니다.
아니, 왜? 설마 존경받는 제사장과 레위인들은 그 자리를 피하고 지나갔을까?
제자장들은 영적지도자입니다. 레위인들은 제사장을 돕는 성전에서 봉사하는 자들입니다.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 같은 존재들입니다. 교회를 열심히 다니고 직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왜 돕지 않았을까?
합당한 이유는 많습니다. 옷이 벗겨져 있기에 그가 유대인이지 이방인인지 정체를 알 수 없기 때문에 망설여집니다. 또 혹시 죽었을지도 모르는데, 시체를 만지는 것은 유대 율법의 의해 부정해지기 때문입니다. 위험한 길에서 지체하다가 자신도 강도를 만날까봐 두려웠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이 비유에서 제사장이나 레위인들 등장시킨 목적은 분명합니다.
율법적 종교의 빠진 종교지도자들의 허상을 폭로하기 위해서입니다. 형식적인 율법에 얽매여 곤경에 처한 사람은 돌보지 않는 종교적 위선을 고발한 것입니다.
이 비유가 더 충격적인 것은, 사마리아인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인은 누구인가?
원래 이스라엘은 한 민족이었는데, 솔로몬 왕 이후에 남과 북으로 분열되었습니다. 남유다는 유다지파와 베냐민지파, 북이스라엘은 나머지 10개의 지파를 중심으로 나라가 형성되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주전 722년경에 앗수르에 의해서 완전히 멸망합니다. 대부분 포로로 끌려갔고, 또 앗수르 본토 사람들을 사마리아로 이주시켜 혼혈정책을 펼침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정체성을 말살하였습니다. 결국, 북이스라엘 왕국에서는 혼혈민족 사마리아인들이 주류를 이루게 되었고, 예수님 시대에 와서 사마리아지방의 사람들은 혼혈과 종교의 혼합으로 유대인들에게 경멸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성전재건과 성벽재건의 역사에도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의 도움을 거절하게 되고 서로의 갈등은 극에 달하게 됩니다. 이런 역사적 사건들도 인해 유대인과 사마리아인들 사이에는 깊은 적개심과 갈등이 있었습니다. 그런 사마리아인이 유대인을 도왔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 이 세 사람 중 누가 강도 만난자의 이웃입니까? 사마리아인이죠.
삼척동자도 압니다. 그런데, 오늘 율법교사는 뭐라고 대답합니까? 36-37절입니다.
36.네 생각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37.이르되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하시니라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예수님의 마지막 질문에 율법교사는 뭐하고 답하나요?
율법교사의 속은 완전히 뒤집어졌고, 자존심이 상했을 것입니다. 그가 절대 ‘사마리아인’이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자존심 때문에 ‘자비를 베푼 자’라고 대답할 뿐입니다. 예수님은 가서 너와 이와 같이 하라라고 말씀하십니다. 율법교사의 의도와 생각과는 다른 대반전으로 대화가 끝납니다. 율법교사에게는 모욕적이고 수치스런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율법교사가 생각했던 이웃과 예수님의 말씀은 많이 달랐습니다. 율법교사에게 이웃은 이미 유대인으로 한정되었고, 유대인 중에서도 경건하지 않는 죄인과 세리, 창녀 같은 사람은 이웃에 포함되지 않았습니다. 확실한 것은, 사마리아인은 이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마리아인은 이웃이 아니라 원수였고,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유대인이 무시하고 경멸하던 존재였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중심으로 모든 가치와 기준을 두고 있기 때문에 이웃의 범위와 사랑을 해도 되는 범위를 정해버립니다. 나와 수준이 비슷하고 교제할만한 조건이 있는 사람을 이웃으로 받아들입니다. 나의 기준에 맞는 않는 사람은 상대하지 않습니다. 같은 교회 내에서도 그룹을 만들고 소외를 시킵니다.
오늘 ‘이웃사랑’이라는 주제의 진짜 의도는 이웃사랑 그 이상의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된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사랑해야할 이웃이 누구인가에 대한 경계선과 잣대입니다. 우리가 선을 긋고 구별하고 판단한, 이웃과 이웃이 아니라고 생각한 사람들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이웃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모든 사람입니다. 주님이 그들을 차별하지 않으시고 아낌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우리의 이웃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사랑을 전하는 예배자가 되길 바랍니다.

2. 나는 누구에게 이웃인가?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어떻게 사랑을 증명하셨습니까? 십자의 사랑으로 증명되었습니다. 죄로 죽을 수밖에 없던 우리를 위해 대신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내가 사랑받을 만한 존재가 되어서 나를 사랑해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다는 것은 우리의 삶이 변화된다는 것입니다. 입으로 십자가 사랑을 믿는다고 하면서 날 위해 대신 죽으신 예수님을 사랑하지도 않고, 또 그분이 죽기까지 사랑하시는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은 모순입니다. 요한일서4:11
“사랑하는 자들아 하나님이 이같이 우리를 사랑하셨은즉 우리도 서로 사랑하는 것이 마땅하도다”
오늘날, 현대사회는 개인주의가 점점 심해집니다. 자신과 가정에 이익을 주는가를 철저히 계산하고 따져서 관계를 형성하고, 자신이 속한 이익집단의 목소리를 냅니다.
(예화) 어느 존경받는 목사님이 은퇴하고 기독교적으로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어서 뜻있는 교회들과 성도들의 힘을 모아서 지체장애 학생들을 위한 특수학교를 세우고자 했습니다. 강남에 부지를 마련하고 공사를 시작하려는데 거센 반대의 소용돌이에 휘말렸습니다. 동네주민들이 일어나 완강하게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지체장애 학생들이 동네에 들락거리면 아파트 값이 떨어진다는 것입니다. 이웃에 피해를 주지 않도록 건물 구조를 설계하고, 특수학교가 들어와도 땅값이 떨어지지 않고 오히려 올랐다는 다른 사례들을 가지고 설득해도 무조건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목사님께서 직접 반대자들의 대표를 만나고 가정을 방문해서 이 특수학교가 지체장애 학생들과 학부모들에게 얼마나 절실한 것인지를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이들을 만나고서 놀란 것은,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이 강남의 유명한 대형교회를 다니고, 장로와 권사인 분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심지어 반대파를 변호했던 유명한 변호사조차도 집사였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 말로는 고백하지만, 예수님이 말씀하신 이웃사랑에 대한 뜻과는 전혀 상관없이 그저 자신의 부를 지키기 위해서 막무가내로 반대하는 것입니다.
제자는 예수님의 말씀과 뜻을 따라야 하는데, 돈을 쫓아가고 섬기는 우상숭배자의 모습과 다르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교회에 와서 예배도 드리고 종교 활동은 열심히 하지만 그들을 지배하는 것은 세상적 가치관이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지 않는 위선적인 종교인들이었습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에 의하면, 거룩한 제사장도 정통 유대인인 레위인도 참된 이웃이 아닙니다. 율법을 전문적으로 연구하고 거룩한 지위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주일날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심지어 목회자가 거룩한 가운을 입고 예배를 집례 한다고 해서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사회적 약자나 곤궁에 처한 사람에게 좋은 이웃이 됩니다.
오늘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전혀 기대하지 않은 인물입니다.
오히려 관계하고 싶지도 않고, 엮기기 조차 싫은 미워하는 존재입니다. 그런데, 그가 좋은 이웃이 되어 주었더라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이웃이란 내가 규정하는 것이 아니라 어려운 처지에 있는 자를 도와줄 때 이웃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화)제가 미국에서 공부 중에 어떤 목사님을 만나게 되어서 그분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분이 어떻게 자신의 인생이 바뀌게 되었고 목사가 된 사건을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그분이 청년 시절, 처음 아무것도 없이 무작정 미국에 와서 엄청 고생을 했습니다. 돈도 없고 말도 어눌하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아르바이트와 어학원에 다니며, 정말 고되지만 미국생활의 정착을 꿈꾸며 살아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운전하고 가다가 한 외진 도로에서 차가 고장이 나 멈춰선 것입니다. 값싼 중고차를 타고 다니다가 차가 완전히 퍼진 것입니다. 굉장히 당황스럽고 마음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습니다. 낯선 미국 땅, 외롭고 보잘 것 없는 자기 모습에 낙심하고 있었습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지는데, 지나다니는 차도 드문 한적한 곳이었습니다. 얼마나 두려워요. 그나마 가끔 오는 차들도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그런데, 어떤 한 자동차가 멈춰 섭니다. 그리고 한 덩치가 큰 사람이 내리는 데, 흑인이었습니다. 이 분이 굉장히 겁이 났습니다. 혹시 총을 빼들면 어떡하지? 나를 해코지 하는 강도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 그 덩치 큰 흑인이 와서 친절하게 도움이 필요하지 않냐고, 도와주고 싶다고 하는 것입니다. 도저히 차를 고칠 수 없자 자신을 태워 목적지까지 친히 안내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자기를 위해 기꺼이 많은 시간과 수고를 아끼지 않고 도와준 것입니다. 자신은 미국에 온지 얼마 안 되는 동양인이고 말도 어눌했는데, 도저히 이런 도움에 이해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흑인이 하는 말이 ‘난 크리스천이다. 예수님이셨다면 반드시 당신을 도울 것이다. 그래서 당신을 기쁜 마음으로 돕는 것이다.’라고 말했다는 것입니다.
이분이 굉장한 충격을 받습니다. 흑인에 대한 선입견과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관점으로 사람들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말한 예수님을 믿게 되고, 결국 목사까지 되었다고 말합니다.
여러분, 우리가 어떨 때 감동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황에, 전혀 예상하지 못한 사람이 도와주는 거예요. 내가 기대했던 사람은 피하고 지나쳤는데, 기대하지 못할 뿐 아니라 평소에 가까이 하고 싶지 않고 배척하고 멀리했던 사람이 나를 마음을 다해 도와줄 때 감동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을 통해 기억해야 할 것이 있어요. 좋은 이웃의 기준은 내가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혈통과 전통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 그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을 이웃이라고 이야기 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웃을 사랑해야할 결정적 이유가 있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사랑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아무 대가 없는 사랑과 헌신으로 우리를 구원하시고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내가 사랑할 이웃을 고를 자격이 없습니다. 그저 누군가의 이웃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주님이 자격이 있기에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사랑과 은혜를 안다면, 우리도 당연히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특히, 지금은 코로나 바이러스로 우리의 이웃들은 두려움과 위기에 빠졌습니다.
이 시기에 교회는 어떻게 이웃이 될 수 있을까 고민하고 노력해야 합니다. 좋은 이웃이 되라는 주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얻게 된 것입니다. 오늘 예배를 통해 우리가 받은 사랑을 다시 한 번 기억하고 그 사랑은 전하는 좋은 이웃들이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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